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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서서 - 김현

펌글 2010. 4. 29. 17:04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인물은 공명이다. 공명이 나오는 장면은 언제나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그가 그와 관련된 모든 일을 수학적인 정확성을 갖고 읽어낸 데서 나온다. 그것은, 사람의 일과 자연의 일을 하나로 묶어, 아니, 바로 하나로 이해하여, 자연의 모든 움직임에 섬세한 주의를 하였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다. 

그는 자로 재듯 자연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예측한다. 그것은 사람의 운명을 관찰하고 예측하는 일에 다름아니다. 사람 사는 곳의 리듬이 자연의 리듬과 합치하여 움직였을 때의 절묘한 정신이 바로 공명이다. 

그 공명 곁에, 삼국지를 읽을 때마다 그의 불운을 탓하게 되는 인물이 하나 있다. 그가 서서이다. 그의 불운은 어머니의 사람됨을 읽어내지 못한 데 있다. 어머니가 가짜 편지를 쓸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의 아들의 부끄러운 짓을 깨우쳐주기 위해서라면 죽음도 사양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은 다 알았는데,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 서서는 자기 불운에 어떻게 대처하였을까? 그는 조조에게 아무 계책도 말 안 하기로 대처하였다. 

그의 행적 중에서 내 호기심을 강하게 끄는 것은, 적벽대전에서 살아 남기 위해 방통의 계교에 따라 서량으로 떠나는 행위이다. 그것은 조조를 배반하는 것도 아니며, 유비에게 협력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다만 떠나간 것이다. 공명처럼 아름답게 살 수 없을 때는, 다만 떠나가야 하는 것일까. 

삼국지의 어디를 뒤져봐도 그 이후의 그의 삶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어떻게 죽었을까? 옛 사람들이 바라던 대로 천수를 다 누렸을까? 아니면 그래도 싸움의 와중에 죽었을까? 

서서의 삶은 공명의 아름다운 삶에 비했을 때 너무나도 안타까운 삶이다. 그러나 어쩌랴, 그런 삶밖에 살 수 없는 사람이 공명 같은 삶을 살 수 있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Posted by 네오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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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사카모도 료마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용마가 간다'라는 만화를 읽으면서였다.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다. 만화라니... 당시 나는 검도를 갓 배우기 시작한 시기였고, 만화에서 료마는 일본 최고의 검객으로 묘사되었다. 최고의 검객이라... 멋지지 않나? 만화에서 료마는 중국에 가서 중국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도 한다.
처음 사카모도 료마라는 인물에 매료된 것은, 그가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일본을 구해내었기 때문이기 보다는 북진일도류를 대표하는 검객으로서 한 남자가 보일 수 있는 극한의 기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점은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만화에서 가장 감동을 받았던 부분이 100% fiction이었다는 점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그러나, 왜 하필 이순신 장군과 같은 분이 아니라 일본인 사카모도 료마인가?
나는 절대 친일파는 아니다(^^ 이런 걸 이런 식으로 써야 하나?). 따지고 보면 친일파라는 용어도 재미있는 용어다. 예컨대 친한파 같은 단어와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친일파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해석해야 하는 용어이다. 만일 친한파와 같은 맥락에서 친일파라는 말을 해석한다면 나는 친일파일지도 모르겠다. 일본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고, 언젠가는 일본과 잘 지내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즈음에 나라를 일본에 팔아 먹은 바로 그 '친일파'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분노하고 증오한다. 그리고 일본인 중에서 극우 정치인들 혹은 극우 똘마니들도 마찬가지로 극도로 싫다.
그러나 개인주의 적이지만 겉으로나마 친절하고 소시민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고 법을 반드시 지켜야 하고 남에게 절대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고 믿으며 살아가는 그 일본인들에게는 호감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호감의 한 가운데에 사카모도 료마가 있다.
어떤 면에서 사카모도 료마는 일제강점기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다. 료마 덕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 서양의 식민지냐 자주 국가이냐의 갈림길에서 자주 국가의 길을 가게 된다. 그로 인해 부강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하게 된다. 더군다나 안중근 의사께서 죽인 이토오 히로부미는 료마 덕에 발굴되어 큰 인재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료마가 자신의 일이 잘 안될 경우, 측근들과 함께 망명할 나라로 조선을 염두에 뒀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사실 료마는 조선과의 협력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를 읽어 보면, 확실히 료마는 흥미롭고 매력적인 사내이다. 물론 '료마가 간다'가 역사서가 아니라 소설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어느 역사서도 소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이 책 '료마가 간다'가 묘사하는 료마의 모습을 그저 허구의 인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적어도 정말 그랬을 개연성은 있다고 본다.
나는 이 인물 '사카모도 료마'에 매료되었다. 그 점에서 시바 료타로와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시바 료타로가 이 인물에 대해 반드시 책을 써야겠다고 작정했던 것처럼, 나도 이 인물에 대해 내가 느꼈던 감정, 이 인물로 인해 내가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글로 써야겠다고 작정했다. 그리고 지금 쓰는 이 글이 첫 발걸음이다. 어떻게 보면 사카모도 료마는 현재의 내 모습 - 그것이 성공적이든 실패작이든, 아니면 내가 원했던 것이든 아니든 간에 - 을 만들었다. 교육자는 처음부터 내가 꿈꾸던 직업은 아니었다. '료마처럼 될 수 없다면 료마를 길러낸 스승이라도 되자'. 이것이 내 생각이었다. 물론 지금의 내 모습은 그것마저도 할 수 없는 위치이지만, 누가 알겠나. 혹시 그렇게 될 지.
Posted by 네오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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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교수의 글에서 인상적인 대목 하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 - 정확히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인식 - 은 마치 잘못된 지도를 펼쳐놓은 것과 같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 부분을 다시 찾아보려 했지만 찾을 수 없어 생각나는대로 적었다.

우리나라에게 잘못된 지도는 왜곡되고 있는 역사와 언론이다. 친일파와 군사독재의 주역들, 그리고 그들을 찬양했던 자들이 나라의 주도층이 된 지금, 그들에 의해 제시된 지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잘못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역사는 완전히 다시 쓰여졌다. 때문에 부유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개발도상국들에게 자유 무역과 자유 시장을 권장하는 것이 역사적 위선이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 역사는 승자들에 의해서 쓰여지는 것이고, 과거는 현재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 만큼 부자 나라들은 상당 정도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자국 역사를 실제 모습 그대로가 아닌 현재 스스로를 바라보는 자국의 관점에 더 어울리게끔 점진적으로 고쳐 쓸 수밖에 없다"

이 글이 우리의 역사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섬뜩하다. 진실된 과거-역사는 이제 잊혀지고 왜곡되고 포장되어버리는 것일까?
Posted by 네오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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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나무에 밥을 먹으러 갔다가 우연히 주워든 책이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었다.
혼자 밥을 먹으러 가는 경우가 많아 보통은 무료함을 달랠 책을 한 권씩 들고 갔었는데 이날은 건망증 덕에 좋은 책을 보게 되었다.
비록 번역본이기는 하지만 문장의 유려함을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논문을 쓰면서 유난히 기승전결과 같은 문장의 구조와 연결에 집착하는 스타일이라 더욱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것을 잘 풀어내어 간결하게 정리한 글에 우선 감탄했다.
책의 앞부분은 63년생이 저자가 우리나라에서 자라면서 보았던 것들에 대한 회고 비슷한 내용들이다. 물론 저자가 자신의 논리를 풀어나가기 위해 꼭 써야 했던 부분들이지만 그 글을 읽으면서 나도 마치 과거로 돌아가 내가 자라났던 집안과 뛰놀았던 골목들을 바라 보는 듯 했다.
수사가 많고 현란한 수식어로 가득찬 문장을 싫어하는 나이지만 장하준 교수의 글은 세밀한 묘사를 하면서도 간결해서 읽는 글이 머리 속의 이미지로 너무 쉽게 형상화되었다. 나도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면... 박사과정 동안 겪었던 일들로 인해 손에서 놓아버린 글쓰기에 대한 향수를 다시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글이었다.
오랜만에 좋은 글을 담은 책을 보아서 너무 기쁘다. 더욱 기쁜 점은 문장 뿐 아니라 그 내용과 사상까지도 나의 마음에 꼭 든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내가 좋아하는 경제학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은 보다 행복할 수 있겠지.
Posted by 네오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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