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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0.05.08 할머니 이제는 할아버지 옆에서 편히 쉬세요...
근혜에게서 문자가 왔을 때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목표에 계셨을 때도 한번 위기가 있었고, 광주에서도 한번 안 좋으셨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이번에 위독하다는 말씀을 어머니에게서 들었을 때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월요일에는 연구실에 막 도착한 아침부터 최근 거의 없었던 짜증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마구 소리를 질렀다. 게다가 저녁에는 주영이와 말다툼까지 하고. 화요일에는 아침에 정신이 없었는지 양복 상의에 면바지를 입고 출근했다. 그러던 중에 결국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받게 되었다.

화요일은 그대로 학교와 집에서 보내고, 다음 날 11시에 예정된 입관식에 늦지 않기 위해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성남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광주 보훈병원 장례식장으로 갔다. 예전부터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았던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들 간의 관계는 최근 상속 문제로 더욱 악화되어, 과연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를 내려가는 버스 안에서 꽤나 고민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하고 보니 걱정할 정도로 어색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할머니께 예를 올리고 집안 어른들에게 차례대로 인사한 후에 나이가 한참 차이 나는 동생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입관식은 예정보다 조금 늦게 시작되었다. 장례절차를 진행하는 상조회 직원들이 안에서 할머니의 몸을 닦고 수의를 입히는 동안, 가족들은 밖에서 유리를 통해 진행되는 모습을 들여다 보았다. 다른 사촌들에 비해 나는 할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렸을 때 네 살까지 시골에서 살았고, 국민학교 때에는 방학 때마다 시골에서 보냈다. 할머니께서는 그 시골에서 조그만 가게를 하셨는데, 다른 사촌들이 명절때마다 내려와서 가게에 있는 과자를 먹겠다고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 지를 고민할 때, 나만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과자나 음료수를 내다 먹곤 했다. 물론 가장 나이 많은 사촌보다 내가 열살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뭏든 나는 다른 어떤 사촌보다도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많다.

하지만 입관식을 하는 동안 내 머리속에 떠오르는 할머니와의 추억은 없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계속 마음이 심난했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추억들이 밀려와 슬픔이 복받친다거나 하는 감정은 없었다. 아마 할머니가 병상에서 누워 생활하신지가 오래 되었고, 할머니의 죽음에 대비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사실 할머니는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그 날부터 이미 이 세상에 대한 애착은 잃어버리신 것 같았다. 마치 영혼은 할아버지를 따라 이미 가시고, 이 땅에는 육체만을 남겨 놓으신듯 했다. 그 시간이 너무 길었다. 우려 5년이나 할머니는 아무런 미련이 없는 이 땅에 계셨던 것이다.

어쩌면 오늘은 지난 5년 간의 세월 중에서 할머니에게 가장 기쁘신 날인지도 모르겠다. 드디어 대전 현충원에 계신 할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날인 것이다. 상조회 직원은 할머니의 몸과 얼굴을 무척이나 꼼꼼하게 닦고 있었다. 할머니, 이렇게 꽃단장 하시고 이제 다시 할아버지께로 가시는 군요. 무거운 육신을 내려 놓으시고 이제는 새옷을 입으시고서 훨훨 날아서 할아버지께로 가시네요.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흐르지 않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할머니를 보내야 하는 사람들이야 슬퍼서 지금 통곡을 하겠지만 정작 할머니 본인은 할아버지께 시집가던 날 다음으로 설레는 날이 아니었을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생전에 항상 조용하게 지내셨다. 다른 집들은 할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행패를 부리시거나, 할머니가 잔소리를 퍼부어대는 일이 다반사였지마, 우리 집만은 늘 조용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께 모든 것을 의지했고, 할아버지께서 시키는대로 모든 일을 다하셨다. 할아버지 역시 할머니가 하실 일들까지 손수 챙기실 정도로 유독 할머니한테만은 자상하였다. 이렇게 부부금슬이 좋은 것은 집안의 전통인 것일까. 아버지와 어머니도 아직까지 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을 만큼 금슬이 좋으시다. 특히나 자상하신것은 언제나 남편 쪽이다.

그래서였을까.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견디실 수가 없었나 보다. 자식들에게도 이렇다 할 애착은 없으셨던 것 같다.할머니는 지난 5년의 세월을 그냥 버티어 오셨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부쩍 늙으시면서 기력을 잃으셨고, 몸에 별다른 이상이 없으신데도 힘이 없어서 늘 누워계셔야 했다. 부부의 정이 너무 깊으면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주영이는 할머니를 뵐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될 지 궁금해 했다. 나는 항상 대답을 회피했지만 며칠 전 아니 오늘 아침에도 당연히 집에 있을 것으로 알았던 주영이가 없는 집은 왠지 쓸쓸하기 그지 없었다.

입관식을 마치고 하루를 보낸 후 다음날 노제를 위해 진도로 향했다. 두어시간을 걸려 진도에 도착해 마을분들과 다시 한번 제례를 하고 나서 다시 광주의 화장터로 향했다. 화장을 마친 후에 대전의 현충원으로 출발했다. 올해 봄은 100년만에 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날씨가 좋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이번 주에는 전국적으로 날씨가 풀렸다. 이 날의 날씨도 어느 따스하고 한가한 봄날 오후라고 할 만큼 무난한 날씨였다. 진도로 가는 길에는 길 가의 유채꽃이 너무나도 아름다왔다. 전라도 시골길은 구석구석 잘 가꾸어져 있어서 무척이나 아름답다. 사람 손이 잘 닿지 않을 법한 곳까지도 잘 꾸며져 있어서 깜짝 놀라곤 한다.

지난 5년간 할머니는 이렇듯 좋은 날씨에 한가하게 봄나들이를 갈만한 여유가 있었을까. 광주에서 진도로, 진도에서 다시 광주로 그리고 광주에서 대전으로, 이렇듯 할머니를 기리는 많은 사람들과 나들이를 할 기회는 절대 없었을 것이다. 평일 오후의 이런 한가한 드라이브를 할머니는 즐기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할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아닌가. 그 어느 때보다 마음 편한 날이시겠지.

현충원에 도착하고 난 후의 일정은 의외로 간단했다. 할아버지의 묘는 현충관에서 걸어서도 5분 내에 갈만큼 가까웠고, 할머니의 유골함을 안장하는 의식도 매우 간소하게 치뤄졌다. 장례식 초기의 무거웠던 분위기는 나들이 탓이었을까, 이제는 할아버지 옆에서 안식하게 된 할머니를 축하드린다고 표현할 만큼이나 가벼워져 있었다. 날씨는 따사로왔고, 주변의 경치는 현충원인 만큼 탁 트여서 시원할 정도였다. 계룡산이 지척이라 경관 또한 아름다왔다.

전라도 사람들이란 다 그런 것일까. 우리 집안은 부모 자식 간의 애틋한 정의 표현은 많지 않은 것 같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분명 나를 아끼셨던 것 같지만 다른 집안들 같이 눈에 띌 정도의 표현은 없으셨다. 나도 어렸을 때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제법 따랐지만 나이 들고서는 여느 손주들과 차이가 없게 행동했던 것 같다. 지금에 와서 거기에 대한 어떤 미련이나 후회는 없다. 다만 우리 아이들과는 다르게 지내고 싶다. 무덤덤한 집안의 전통 따위, 계속 이어나가고 싶지 않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마음껏 사랑을 표현해 주고 싶다. 우리 서진이. 

이런 전통 따위 더 빨리 깨어졌더라면 할머니도 할아버지 없는 5년을 더 행복하게 보낼 수 있으셨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할머니. 이제는 지난 5년일랑 잊으시고 할아버지 옆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지내세요. 번잡한 가족사 따위 깡그리 잊어버리시고 행복한 기억만 추억하시며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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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증후군  (0) 2011.02.16
Posted by 네오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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