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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독후감 2019. 12. 5. 13:12

명작이란 무엇일까? 더 정확하게는, 명작은 우리에게 무엇을 생각하게 하고 무엇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긴 시간 동안 '재미있는' 책들을 읽으려고 했다. '흥미로운' 책에 더 관심이 갔고, 그래서 남들이 많이 읽는, 유행하는 책들을 읽어보려고 했다. 어쨌든 동시대의 감성을 따라잡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

아니, 사실은 책보다는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봤다.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별 생각없이 스크린을 들여다보면 시간이 훌쩍 가면서 뭔가 다른 것에 몰두할 수 있는 것 같았고, 그 시간동안 뇌가 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갑자기 '위대한 개츠비'라는 소설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영화가 만들어졌고, 당대 가장 유명한 배우 중 하나인 디카프리오가 주연으로 나왔다. 그러나 나는 영화를 보진 않았다. 뭔가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지루할 것 같았고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냥 미국식의 영웅, 개척시대에 뭔가 대단한 일을 한 사람에 대한 내용일까.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토록 명작이라는데 한번 쯤 읽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더 정확히는, 자주 듣던 팟캐스트 채널에서 '위대한 개츠비'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개츠비가 처음 등장할 때의 그 눈부신 모습이 기억난다고 누군가 말했을때 뻔한 궁금증이 올라왔다. 왜 그 사람은 그런 말을 했을까? 그럼 내가 생각했던 미국식의 영웅 이야기가 아니란 말인가? 그런 생각에,  예스24에서 헐값으로 사놓은 오래된 명작 시리즈 ebook 들 중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고 너무나 지루했다. 아무 개성 없는 상류층 사람들의 묘사가 이어졌다.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 가식적인 사람들의 가식적인 생활에 대한 무미건조한 묘사였다. 도대체 이 책이 왜 명작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서울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을 읽는 것 외에 달리 할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개츠비의 저택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을 파티에 초대해서 돈을 뿌리는 남자. 비밀에 쌓여있어서 그저 밀주로 돈을 벌었을거라고 터무니 없는 추측을 하는 이 남자에 대한 내용이 나올 때에도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그러다 닉이 처음 개츠비를 만나는 장면이 나왔다. 개츠비인지 모른 채로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알게 되는 장면이었다. 기대와는 달리 눈부시지도 않았고 그저 그런 등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흑백영화에서 컬러영화로 바뀌는 순간처럼 개츠비의 등장은 뭔가 생동감을 느끼게 했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더욱 더, 그때가 뭔가 이 책에 가장 큰 변화가 온 시점인 것으로 느껴진다. 아마 나타난 그 시점보다는 그 이후의 이야기가 나의 기억 속에 있는 그 등장의 의미를 바꾸게 한 듯한 느낌이다. 

개츠비가 생동감을 준 이유는 그가 그때까지 묘사된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사람이였기 때문이다. 닉의 시점에서 묘사되는 이 소설에서, 닉이 개츠비에 대해 느끼는 감정도 이 순간부터 달라지기 시작한다. 가속도가 붙으면서 달라지는 시점은 개츠비가 데이지에 대한 사랑 하나로 그 모든 일을 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순간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남자의 오직 단 하나의 목적은 데이지와의 만남이었다. 닉의 주선을 통해 데이지를 만나고 개츠비는 오랜 시간동안 그토록 꿈꾸어왔던 사랑을 확인하고자 한다. 데이지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자신의 변함없는 믿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본인이 그토록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사랑했던 자신의 마음 속의 데이지와 실제 데이지와의 좁혀지지 않는 간격을 느끼게 된다. 데이지가 비록 자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남편인 톰에게도 그 사실을 이야기하는 그 순간에도, 자신이 생각하고 꿈꾸어왔던 모습의 데이지는 아니라는 사실을 더 절실히 깨닫게 된다.

자동차 사고로 머틀이 죽고, 데이지 대신 자신이 운전했다고 말하겠다는 개츠비가 새벽까지 집 밖에서 데이지를 걱정하며 지켜보는 순간에도, 개츠비는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것이 끝내 도달할 수 없고 자신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이었다는 것을 직감하면서도 개츠비는 여전히 최선을 다해 자신의 몸을 던진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쉽게 결론이 날 줄 알지 못했다. 기생충을 보면서도 뭔가 나의 기대보다 영화가 빨리 마무리되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오랜동안 흥미 위주로 봤던 영화들이, 마지막 순간에 시청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최후의 볼거리를 길게 보여주는 것에 익숙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여운은 길었다. 피츠제랄드의 마지막 문장들은 계속해서 그 글을 다시 읽게 만들었다. 길었던 소설의 내용들이 그 문장들에 압축되어 있었다. 그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면서 개츠비는 무엇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그 하나의 희망에 바쳤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다. 오직 하나의 희망에 모든 일생을 걸고 살아왔다. 그 희망 외에 그에게는 어떤 즐거움도 없었다. 다른 어떤 사람과 어떤 형태로도 진지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 개츠비가 죽고, 매일 같이 그의 집에서 파티를 즐겼던 그 많은 사람들과 같이 일했던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개츠비에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자 했던 사람은 없었다. 오직 닉을 제외하고는. 왜 그랬을까?

그러나 이 소설에서 오직 개츠비와 닉만이 사람다운 생동감을 가지고 있다. 돈과 얕은 쾌락 위주의 일상적 사교활동에 찌들어 있는 동부의 이 사람들에게 닉은 환멸을 느끼고, 동부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우리의 삶은 동부와 같다. 그러나 개츠비와 같은 사람은 그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을 간직한 채로 산다. 그 희망이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이란 사실을 깨달은 후에도 그는 여전히 온 몸을 던져 살고 있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그리고 왜 사는걸까? 결국 명작은 우리에게 항상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의 여운이 매우 길게 남는다.

 

"나는 한동안 그곳에 앉아 미지의 옛날을 상상하다, 개츠비가 부두 끝에 있는 데이지의 집에서 처음으로 초록색 불빛을 발견했을 때 느꼈을 그 신기함과 경이로움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먼 길을 돌아 이 푸른 잔디에 이르렀다.

이제 그 꿈은 너무 가까이 있어 정말로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꿈이 어느새 그의 뒤쪽으로 지나쳐 버린 것을 느끼지 못했다. 대륙의 어두운 들판이 밤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도시 너머 광대하고 아득한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개츠비는 해가 갈수록 멀어지는 그 초록 불빛의 황홀한 미래를 믿었다. 그때의 초록색 불빛은 우리를 피해 갔지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내일이 되면 우리는 더 빨리 뛸 것이고, 그럴수록 두 팔은 더 멀리 뻗어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화창한 날 아침...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Posted by 네오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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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사카모도 료마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용마가 간다'라는 만화를 읽으면서였다. 조금은 부끄럽기도 하다. 만화라니... 당시 나는 검도를 갓 배우기 시작한 시기였고, 만화에서 료마는 일본 최고의 검객으로 묘사되었다. 최고의 검객이라... 멋지지 않나? 만화에서 료마는 중국에 가서 중국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도 한다.
처음 사카모도 료마라는 인물에 매료된 것은, 그가 풍전등화와도 같았던 일본을 구해내었기 때문이기 보다는 북진일도류를 대표하는 검객으로서 한 남자가 보일 수 있는 극한의 기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점은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만화에서 가장 감동을 받았던 부분이 100% fiction이었다는 점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그러나, 왜 하필 이순신 장군과 같은 분이 아니라 일본인 사카모도 료마인가?
나는 절대 친일파는 아니다(^^ 이런 걸 이런 식으로 써야 하나?). 따지고 보면 친일파라는 용어도 재미있는 용어다. 예컨대 친한파 같은 단어와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친일파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해석해야 하는 용어이다. 만일 친한파와 같은 맥락에서 친일파라는 말을 해석한다면 나는 친일파일지도 모르겠다. 일본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고, 언젠가는 일본과 잘 지내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즈음에 나라를 일본에 팔아 먹은 바로 그 '친일파'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분노하고 증오한다. 그리고 일본인 중에서 극우 정치인들 혹은 극우 똘마니들도 마찬가지로 극도로 싫다.
그러나 개인주의 적이지만 겉으로나마 친절하고 소시민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고 법을 반드시 지켜야 하고 남에게 절대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고 믿으며 살아가는 그 일본인들에게는 호감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호감의 한 가운데에 사카모도 료마가 있다.
어떤 면에서 사카모도 료마는 일제강점기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다. 료마 덕에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단행하고 서양의 식민지냐 자주 국가이냐의 갈림길에서 자주 국가의 길을 가게 된다. 그로 인해 부강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를 침략하게 된다. 더군다나 안중근 의사께서 죽인 이토오 히로부미는 료마 덕에 발굴되어 큰 인재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료마가 자신의 일이 잘 안될 경우, 측근들과 함께 망명할 나라로 조선을 염두에 뒀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사실 료마는 조선과의 협력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다.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를 읽어 보면, 확실히 료마는 흥미롭고 매력적인 사내이다. 물론 '료마가 간다'가 역사서가 아니라 소설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어느 역사서도 소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이 책 '료마가 간다'가 묘사하는 료마의 모습을 그저 허구의 인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적어도 정말 그랬을 개연성은 있다고 본다.
나는 이 인물 '사카모도 료마'에 매료되었다. 그 점에서 시바 료타로와는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시바 료타로가 이 인물에 대해 반드시 책을 써야겠다고 작정했던 것처럼, 나도 이 인물에 대해 내가 느꼈던 감정, 이 인물로 인해 내가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글로 써야겠다고 작정했다. 그리고 지금 쓰는 이 글이 첫 발걸음이다. 어떻게 보면 사카모도 료마는 현재의 내 모습 - 그것이 성공적이든 실패작이든, 아니면 내가 원했던 것이든 아니든 간에 - 을 만들었다. 교육자는 처음부터 내가 꿈꾸던 직업은 아니었다. '료마처럼 될 수 없다면 료마를 길러낸 스승이라도 되자'. 이것이 내 생각이었다. 물론 지금의 내 모습은 그것마저도 할 수 없는 위치이지만, 누가 알겠나. 혹시 그렇게 될 지.
Posted by 네오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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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교수의 글에서 인상적인 대목 하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잘못된 인식 - 정확히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인식 - 은 마치 잘못된 지도를 펼쳐놓은 것과 같다.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 부분을 다시 찾아보려 했지만 찾을 수 없어 생각나는대로 적었다.

우리나라에게 잘못된 지도는 왜곡되고 있는 역사와 언론이다. 친일파와 군사독재의 주역들, 그리고 그들을 찬양했던 자들이 나라의 주도층이 된 지금, 그들에 의해 제시된 지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잘못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역사는 완전히 다시 쓰여졌다. 때문에 부유한 세계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개발도상국들에게 자유 무역과 자유 시장을 권장하는 것이 역사적 위선이라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 역사는 승자들에 의해서 쓰여지는 것이고, 과거는 현재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런 만큼 부자 나라들은 상당 정도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자국 역사를 실제 모습 그대로가 아닌 현재 스스로를 바라보는 자국의 관점에 더 어울리게끔 점진적으로 고쳐 쓸 수밖에 없다"

이 글이 우리의 역사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신기하고 한편으로는 섬뜩하다. 진실된 과거-역사는 이제 잊혀지고 왜곡되고 포장되어버리는 것일까?
Posted by 네오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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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나무에 밥을 먹으러 갔다가 우연히 주워든 책이 장하준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이었다.
혼자 밥을 먹으러 가는 경우가 많아 보통은 무료함을 달랠 책을 한 권씩 들고 갔었는데 이날은 건망증 덕에 좋은 책을 보게 되었다.
비록 번역본이기는 하지만 문장의 유려함을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논문을 쓰면서 유난히 기승전결과 같은 문장의 구조와 연결에 집착하는 스타일이라 더욱 와 닿았는지도 모르겠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것을 잘 풀어내어 간결하게 정리한 글에 우선 감탄했다.
책의 앞부분은 63년생이 저자가 우리나라에서 자라면서 보았던 것들에 대한 회고 비슷한 내용들이다. 물론 저자가 자신의 논리를 풀어나가기 위해 꼭 써야 했던 부분들이지만 그 글을 읽으면서 나도 마치 과거로 돌아가 내가 자라났던 집안과 뛰놀았던 골목들을 바라 보는 듯 했다.
수사가 많고 현란한 수식어로 가득찬 문장을 싫어하는 나이지만 장하준 교수의 글은 세밀한 묘사를 하면서도 간결해서 읽는 글이 머리 속의 이미지로 너무 쉽게 형상화되었다. 나도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면... 박사과정 동안 겪었던 일들로 인해 손에서 놓아버린 글쓰기에 대한 향수를 다시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한 글이었다.
오랜만에 좋은 글을 담은 책을 보아서 너무 기쁘다. 더욱 기쁜 점은 문장 뿐 아니라 그 내용과 사상까지도 나의 마음에 꼭 든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내가 좋아하는 경제학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은 보다 행복할 수 있겠지.
Posted by 네오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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