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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와 중독

잡담 2024. 1. 14. 12:48

좀비 영화를 보면 항상 이런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있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극적인 상황과 끔찍한 설정 등에 끌려서 즐겨 보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30대 후반 정도까지? 어느덧 좀비 영화는 건너뛰게 되었다.

그러다 최근에 든 생각이 있다.

좀비도 어쩌면 현실에서 가져온 비유가 아닐까?

나이가 들면서 영화에 있는 극단적이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들이 사실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현상을 비유해서 만든 것이라고 점점 느끼게 되었다.

예를 들면 키퍼 서덜랜드가 주연한 다크 시티 같은 영화는 말도 안되는 SF물 같지만, 어쩌면 우리는 미디어 등을 이용한 누군가의 조작에 의해  그렇게 매일 조금씩 기억이 리셋되고 다른 삶을 살게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비는 무언가에 중독된 사람에게서 아이디어를 가져왔을지도 모르겠다.

캘리포니아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마약 중독자들은 사실 좀비나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극단적인 것이 아니라 휴대폰 정도만 해도 중독이 되면 자신의 의지를 상실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휴대폰 중독이 뇌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중독이 무서운 것은 그 사람의 본성을 지워버린다는 것이다.

성실하고 호기심 많고 다정다감하던 사람도 중독이 되면 모두 비슷한 모습으로 바뀐다.

더 나아가면 명예나 권력, 돈에 대한 집착도 결국은 중독과 비슷한 것 같다.

인간관계가 지속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나이가 들면서 더 느끼게 되는데,

명예, 권력, 돈에 중독된 사람은 점차 본성이 바뀌고 주변 사람들과 멀어지는 것 같다.

중독은 같이 있으면 즐겁던 사람도 별 쓸모 없는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내가 명예, 권력, 돈을 추구하는 데 있어 저 사람은 무슨 도움이 되나 하는 잣대로 사람을 보기 시작한다.

같이 있어서 행복하고 즐거운 것은 더 이상 어떤 기준이 되지 않는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내가 추구하는 것의 도구일 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가 없어지는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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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네오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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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되고 거기에 코로나가 겹쳐서 아이들이 하루종일 집에서만 지내게 되었다.

그 덕에 점심까지는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되었는데, 기왕 그러는 김에 서현이한테는 수학을 좀 가르치고 서진이는 파이썬 프로그래밍을 좀 가르칠까 싶었다.

처음에는 서현이한테 먼저 스스로 학습지를 풀게 하고, 내가 채점을 한 후에 틀린 것만 알려주기로 했다.

나와 첫 공부를 하던 날, 나는 그냥 폭발해버렸다.

 

"아니 이것도 모를 수가 있단 말이야?"

"넌 아빠 말을 듣고는 있니?"

"방금 설명했는데 벌써 잊어버렸니?"

"그렇게 아무 숫자나 말하지 말란 말이야, 생각을 하고 말을 해야지"

등등...

 

내가 말을 하면서도 심하다 싶을 정도로 소리를 지르고 혼을 냈다.

그러다 아차 싶었고 이제 곧 울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그런데도 서현이는 울지 않았다.

이쯤 되면 "아빠 싫어"하고 가버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끝까지 참고 아빠의 화를 견디고 있었다.

잠시 후 엄마가 지나갔는데, 학습지에서 틀린 부분을 엄마에게는 보이지 않으려고 감췄다.

 

왜 그랬을까?

왜 서현이는 아빠의 심한 말들을 참고 견딘 것일까?

그 와중에도 내 팔을 붙들고 옆에 꼭 붙어앉아있는 서현이를 보며 여러 생각을 했다.

화를 내는 것이 효과적인 학습법일까?

다음날부터는 문제를 풀기 전에 알아야 할 내용을 서현이에게 먼저 설명해주고 난 후에 문제를 풀게했다.

효과가 금방 나타나서, 서현이는 문제도 훨씬 잘 풀고 이해도 더 잘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되었다.

울지 않는 서현이... 서현이는 그렇게 아빠에게 교훈을 하나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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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네오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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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독후감 2019. 12. 5. 13:12

명작이란 무엇일까? 더 정확하게는, 명작은 우리에게 무엇을 생각하게 하고 무엇을 느끼게 하는 것일까?

긴 시간 동안 '재미있는' 책들을 읽으려고 했다. '흥미로운' 책에 더 관심이 갔고, 그래서 남들이 많이 읽는, 유행하는 책들을 읽어보려고 했다. 어쨌든 동시대의 감성을 따라잡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

아니, 사실은 책보다는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봤다.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별 생각없이 스크린을 들여다보면 시간이 훌쩍 가면서 뭔가 다른 것에 몰두할 수 있는 것 같았고, 그 시간동안 뇌가 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갑자기 '위대한 개츠비'라는 소설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영화가 만들어졌고, 당대 가장 유명한 배우 중 하나인 디카프리오가 주연으로 나왔다. 그러나 나는 영화를 보진 않았다. 뭔가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지루할 것 같았고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냥 미국식의 영웅, 개척시대에 뭔가 대단한 일을 한 사람에 대한 내용일까.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토록 명작이라는데 한번 쯤 읽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더 정확히는, 자주 듣던 팟캐스트 채널에서 '위대한 개츠비'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개츠비가 처음 등장할 때의 그 눈부신 모습이 기억난다고 누군가 말했을때 뻔한 궁금증이 올라왔다. 왜 그 사람은 그런 말을 했을까? 그럼 내가 생각했던 미국식의 영웅 이야기가 아니란 말인가? 그런 생각에,  예스24에서 헐값으로 사놓은 오래된 명작 시리즈 ebook 들 중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고 너무나 지루했다. 아무 개성 없는 상류층 사람들의 묘사가 이어졌다.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 가식적인 사람들의 가식적인 생활에 대한 무미건조한 묘사였다. 도대체 이 책이 왜 명작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책을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서울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이 책을 읽는 것 외에 달리 할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개츠비의 저택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을 파티에 초대해서 돈을 뿌리는 남자. 비밀에 쌓여있어서 그저 밀주로 돈을 벌었을거라고 터무니 없는 추측을 하는 이 남자에 대한 내용이 나올 때에도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그러다 닉이 처음 개츠비를 만나는 장면이 나왔다. 개츠비인지 모른 채로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알게 되는 장면이었다. 기대와는 달리 눈부시지도 않았고 그저 그런 등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흑백영화에서 컬러영화로 바뀌는 순간처럼 개츠비의 등장은 뭔가 생동감을 느끼게 했다.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더욱 더, 그때가 뭔가 이 책에 가장 큰 변화가 온 시점인 것으로 느껴진다. 아마 나타난 그 시점보다는 그 이후의 이야기가 나의 기억 속에 있는 그 등장의 의미를 바꾸게 한 듯한 느낌이다. 

개츠비가 생동감을 준 이유는 그가 그때까지 묘사된 다른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사람이였기 때문이다. 닉의 시점에서 묘사되는 이 소설에서, 닉이 개츠비에 대해 느끼는 감정도 이 순간부터 달라지기 시작한다. 가속도가 붙으면서 달라지는 시점은 개츠비가 데이지에 대한 사랑 하나로 그 모든 일을 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순간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남자의 오직 단 하나의 목적은 데이지와의 만남이었다. 닉의 주선을 통해 데이지를 만나고 개츠비는 오랜 시간동안 그토록 꿈꾸어왔던 사랑을 확인하고자 한다. 데이지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자신의 변함없는 믿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본인이 그토록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사랑했던 자신의 마음 속의 데이지와 실제 데이지와의 좁혀지지 않는 간격을 느끼게 된다. 데이지가 비록 자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남편인 톰에게도 그 사실을 이야기하는 그 순간에도, 자신이 생각하고 꿈꾸어왔던 모습의 데이지는 아니라는 사실을 더 절실히 깨닫게 된다.

자동차 사고로 머틀이 죽고, 데이지 대신 자신이 운전했다고 말하겠다는 개츠비가 새벽까지 집 밖에서 데이지를 걱정하며 지켜보는 순간에도, 개츠비는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것이 끝내 도달할 수 없고 자신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이었다는 것을 직감하면서도 개츠비는 여전히 최선을 다해 자신의 몸을 던진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쉽게 결론이 날 줄 알지 못했다. 기생충을 보면서도 뭔가 나의 기대보다 영화가 빨리 마무리되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오랜동안 흥미 위주로 봤던 영화들이, 마지막 순간에 시청자를 만족시키기 위한 최후의 볼거리를 길게 보여주는 것에 익숙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여운은 길었다. 피츠제랄드의 마지막 문장들은 계속해서 그 글을 다시 읽게 만들었다. 길었던 소설의 내용들이 그 문장들에 압축되어 있었다. 그 글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면서 개츠비는 무엇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그 하나의 희망에 바쳤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정말로 이상한 사람이다. 오직 하나의 희망에 모든 일생을 걸고 살아왔다. 그 희망 외에 그에게는 어떤 즐거움도 없었다. 다른 어떤 사람과 어떤 형태로도 진지한 관계를 맺지 않았다. 개츠비가 죽고, 매일 같이 그의 집에서 파티를 즐겼던 그 많은 사람들과 같이 일했던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개츠비에 관심을 갖고 이해하고자 했던 사람은 없었다. 오직 닉을 제외하고는. 왜 그랬을까?

그러나 이 소설에서 오직 개츠비와 닉만이 사람다운 생동감을 가지고 있다. 돈과 얕은 쾌락 위주의 일상적 사교활동에 찌들어 있는 동부의 이 사람들에게 닉은 환멸을 느끼고, 동부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우리의 삶은 동부와 같다. 그러나 개츠비와 같은 사람은 그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을 간직한 채로 산다. 그 희망이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이란 사실을 깨달은 후에도 그는 여전히 온 몸을 던져 살고 있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 그리고 왜 사는걸까? 결국 명작은 우리에게 항상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의 여운이 매우 길게 남는다.

 

"나는 한동안 그곳에 앉아 미지의 옛날을 상상하다, 개츠비가 부두 끝에 있는 데이지의 집에서 처음으로 초록색 불빛을 발견했을 때 느꼈을 그 신기함과 경이로움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먼 길을 돌아 이 푸른 잔디에 이르렀다.

이제 그 꿈은 너무 가까이 있어 정말로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꿈이 어느새 그의 뒤쪽으로 지나쳐 버린 것을 느끼지 못했다. 대륙의 어두운 들판이 밤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도시 너머 광대하고 아득한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개츠비는 해가 갈수록 멀어지는 그 초록 불빛의 황홀한 미래를 믿었다. 그때의 초록색 불빛은 우리를 피해 갔지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내일이 되면 우리는 더 빨리 뛸 것이고, 그럴수록 두 팔은 더 멀리 뻗어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화창한 날 아침...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Posted by 네오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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